
솔직히 저는 <20세기 소녀>를 보기 전까지 ‘첫사랑 영화’라는 말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설레고, 오해하고, 헤어지고, 눈물을 흘리는 비슷한 이야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런 예상에서 조용히 벗어났습니다. 1999년을 배경으로 친구의 첫사랑을 대신 지켜보던 보라가 예상하지 못한 감정을 마주하고, 그 과정에서 사랑과 우정, 그리고 지나간 청춘의 의미를 깨닫게 되는 이야기는 생각보다 깊은 여운을 남겼습니다. 특히 영화가 끝난 뒤에도 한동안 쉽게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할 만큼 결말이 오래 마음에 남았습니다.
첫사랑이 오래 남는 이유, 비디오테이프가 알고 있었다
혹시 첫사랑을 기억할 때, 그 사람보다 그 시절의 공기가 먼저 떠오른 적 있으신지요. 저는 그랬습니다. 대학교 1학년 때,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쯤 있을지 친구들과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하던 그 오후가, 정작 그 사람 얼굴보다 먼저 떠오릅니다. 영화 속 보라가 성인이 된 뒤 낡은 비디오테이프를 통해 운호의 흔적을 다시 마주하는 장면을 봤을 때, 저도 비슷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 영화가 특별한 이유 중 하나는 바로 1999년이라는 시대 배경에 있습니다. 비디오테이프, 삐삐, 공중전화, 캠코더 같은 아날로그 매체들이 화면 곳곳에 등장하는데, 단순한 레트로 소품 이상의 역할을 합니다. 여기서 아날로그 매체란, 디지털 신호가 아닌 물리적 형태로 정보를 저장하고 재생하는 도구들을 말합니다. 비디오테이프에 담긴 영상을 되감아 다시 보는 행위는 기억을 붙잡아 두려는 마음과 닮아 있었습니다.
방우리 감독은 시나리오를 쓰면서 청소년 시절 친구들과 주고받았던 교환 일기를 다시 꺼내 보았다고 밝혔습니다. 그래서인지 영화 속 풍경들은 연출된 세트처럼 느껴지지 않습니다. 제가 직접 보면서도, 저 캠코더와 교복과 방송반의 풍경이 마치 오래전 실제 기억을 마주한 것처럼 자연스럽고 친숙하게 다가왔습니다.
보라가 좋아하는 사람의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 리서치 기관 직원인 척 전화를 걸고, 양호실을 찾아가고, 방송반에 들어가는 과정을 보면서 지금 기준으로는 어이없다 싶으면서도, 오히려 그 불편함이 감정의 밀도를 높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스마트폰 하나로 쉽게 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지금이었다면, 보라와 운호의 관계도 몇 번의 DM으로 시작되고 끝났을지 모릅니다.
영화에서 사용된 OST도 그 시절의 감성을 완성하는 데 큰 역할을 합니다. 조성모의 〈To Heaven〉과 박기영의 〈시작〉은 당시를 직접 경험한 관객에게는 향수를 자극하고, 경험하지 못한 세대에게는 낯설지만 따뜻한 감성으로 다가옵니다. 여기서 OST란 Original Sound Track의 약자로, 영화의 감정선을 음악으로 뒷받침하는 삽입곡들을 가리킵니다. 쉽게 말해 이야기가 말로 다 하지 못하는 부분을 소리로 채우는 장치입니다.
- 비디오테이프·캠코더 등 아날로그 매체가 기억을 붙잡으려는 감정과 겹쳐진다
- 스마트폰 없던 시대의 불편한 소통 방식이 오히려 첫사랑의 감정을 더 진하게 만든다
- 감독의 실제 청소년기 교환 일기가 시나리오의 바탕이 되어 장면마다 실제 기억 같은 온기가 느껴진다
- 〈To Heaven〉, 〈시작〉 같은 OST가 1999년의 감성을 청각적으로 완성한다
요약: 1999년의 아날로그 풍경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첫사랑의 감정을 더 느리고 깊게 쌓이게 만드는 이 영화만의 핵심 장치다.
방우리 감독의 장편 데뷔, 그 결말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이 영화를 보고 결말을 두고 오래 생각했습니다. 해피엔딩도 아닌데, 그렇다고 "슬픈 영화 봤다"는 말로 정리가 되지도 않았습니다. 방우리 감독의 인터뷰에서 읽었던 한 문장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습니다. "첫사랑은 결국 첫 이별이기도 하다." 이 말이 영화 전체를 설명하는 가장 정확한 표현처럼 느껴졌습니다.
<20세기 소녀>는 방우리 감독의 첫 장편 연출작입니다. 감독은 단편 영화 <영희 씨>로 제35회 청룡영화상 단편영화상을 수상하며 섬세한 감정 연출 능력을 먼저 인정받았습니다. 단편과 장편은 전혀 다른 영역입니다. 하나의 감정을 짧게 압축하는 것과, 두 시간 가까운 러닝타임 동안 감정의 흐름을 끊어지지 않게 유지하는 것은 기술적으로도, 체력적으로도 다른 일입니다. 제가 영화를 보면서 가장 놀란 부분도 이 지점이었습니다. 데뷔작 특유의 거친 느낌이 거의 없고, 자신의 색깔이 분명한 감독의 작품이라는 인상이 훨씬 강하게 남았습니다.
운호의 죽음을 직접적으로 설명하지 않는 연출도 처음에는 의아했습니다. 그런데 감독이 의도적으로 사망 원인을 열어두었다는 이야기를 접한 뒤, 그 선택이 이해됐습니다. 심지어 운호를 연기한 변우석 배우에게조차 정확한 이유를 알려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연출 방식은 내러티브 생략(Narrative Ellipsis)의 기법에 해당합니다. 내러티브 생략이란 이야기 안에서 특정 사건이나 정보를 의도적으로 빠뜨려 관객이 스스로 빈칸을 채우게 만드는 서사 기법입니다. 덕분에 운호의 부재는 사건의 원인보다 남겨진 사람의 감정 쪽으로 무게가 쏠립니다.
부산국제영화제(BIFF) 관객과의 대화에서도 운호의 사인에 대한 질문이 가장 많이 나왔다고 알려져 있습니다(출처: 부산국제영화제). 그만큼 많은 관객이 결말을 각자의 방식으로 받아들였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김유정은 엔딩을 좋아했고, 변우석은 아쉬움을 느꼈다고 했는데, 제 경우엔 두 반응이 모두 이해됐습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영화가 끝난 뒤에 슬픔보다 오히려 조용한 그리움이 더 크게 남았거든요.
감독이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은 죽음과 비슷하다"고 말했는데, 영화를 보고 나서야 그 말의 무게가 실감됐습니다. 그래서 운호의 부재는 한 사람의 죽음이라기보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청춘의 어느 시절이 사라지는 감각에 가까웠습니다. 이 영화는 원래 극장 개봉을 목표로 제작됐지만, 코로나19로 인해 넷플릭스 공개를 선택하게 됐고, 결과적으로 글로벌 TOP10 비영어 영화 부문 상위권에 오르며 여러 나라 관객에게까지 이 첫사랑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었습니다.
요약: 방우리 감독은 내러티브 생략 기법으로 운호의 죽음을 설명하는 대신 남겨진 감정에 집중하게 만들었고, 그 선택이 이 영화를 단순한 첫사랑 이야기 이상으로 만들었다.
자주 묻는 질문
Q. 20세기 소녀 운호는 왜 죽은 건가요?
A. 영화는 운호의 사망 원인을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방우리 감독이 의도적으로 열어둔 부분으로, 변우석 배우에게도 정확한 이유를 알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관객이 각자의 방식으로 빈칸을 채우게 하려는 내러티브 생략 기법의 선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Q. 20세기 소녀는 해피엔딩인가요, 새드엔딩인가요?
A. 단순히 어느 쪽으로 분류하기 어려운 결말입니다. 사랑이 이루어지지는 않지만, 그 기억이 보라에게 오랫동안 남아 있다는 점에서 슬픔과 따뜻함이 동시에 존재합니다. 김유정은 이 엔딩을 좋아했고 변우석은 아쉬움을 느꼈다고 했을 만큼, 보는 사람에 따라 받아들이는 방식이 다릅니다.
Q. 20세기 소녀는 어디서 볼 수 있나요?
A.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로, 넷플릭스에서 스트리밍으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원래 극장 개봉 예정이었으나 코로나19 이후 넷플릭스 단독 공개로 전환됐습니다.
Q. 방우리 감독은 어떤 감독인가요?
A. 단편 영화 <영희 씨>로 제35회 청룡영화상 단편영화상을 수상한 감독으로, <20세기 소녀>가 첫 장편 연출작입니다.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 속 특별한 감정을 섬세하게 포착하는 것이 감독 특유의 스타일로 꼽힙니다.
결론
영화를 다 보고 난 뒤 저에게 남은 것은 보라와 운호의 사랑이 이루어졌는지에 대한 결론이 아니었습니다. 그 시절 캠코더 앞에서 환하게 웃던 사람들, 그리고 그 시절의 저 자신이었습니다. 첫사랑이 오래 기억되는 건 그 사람이 특별해서만이 아니라, 그때의 내가 지금과는 다른 사람이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0세기 소녀>를 아직 보지 않으셨다면, 결말에 대한 정보 없이 한 번 감상해 보시길 권합니다. 어떤 결말을 맞이하느냐에 따라 이 영화에 대한 감정이 꽤 달라질 수 있습니다.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른 여운을 남기는 작품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