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세기 소녀>는 1999년을 배경으로 한 청춘 로맨스 영화로, 친구의 첫사랑을 대신 관찰하던 소녀가 예상치 못한 감정을 마주하게 되면서 펼쳐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비디오테이프와 공중전화, 캠코더가 익숙했던 시대의 풍경 속에서 첫사랑의 설렘과 성장, 그리고 시간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는 추억을 따뜻하게 담아냈다. 김유정, 변우석, 박정우, 노윤서가 출연했으며, 아련한 감성과 여운 깊은 결말로 많은 사랑을 받은 작품이다.
영화 <20세기 소녀> 첫사랑은 첫 이별
<20세기 소녀>를 보고 난 뒤 가장 오래 머릿속에 남았던 건 결말이었다. 해피엔딩도 아니고 그렇다고 단순한 비극으로 끝나는 것도 아닌데, 묘한 여운이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야 방우리 감독이 인터뷰에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 "첫사랑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아서 아름답고, 첫사랑은 결국 첫 이별이기도 하다." 이 한 문장이 영화 전체를 가장 잘 설명해 주는 표현처럼 느껴졌다. 영화 속 보라와 운호의 관계는 처음부터 어딘가 엇갈릴 수밖에 없는 운명을 품고 있다. 보라는 친구 연두의 첫사랑을 대신 관찰하다가 우연히 운호와 가까워지고, 서로에게 마음이 생기지만 여러 오해와 상황이 겹치면서 관계는 제대로 시작해 보기도 전에 흔들린다. 중요한 것은 이 과정 자체보다도, 영화가 그 감정을 어떻게 기억으로 남기는가에 있다. 그래서 이 작품은 첫사랑의 설렘보다도 지나간 시간을 돌아보는 아련함에 더 가까운 영화처럼 느껴졌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성인이 된 보라가 과거의 비디오테이프를 통해 운호의 흔적을 다시 마주하는 장면이다. 단순히 옛 추억을 회상하는 장면인데도 그동안 쌓여 있던 감정이 한꺼번에 밀려오면서 큰 여운을 남긴다. 나 역시 이 장면에서는 자연스럽게 감정이 따라가게 됐다. 어쩌면 영화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첫사랑 그 자체보다, 시간이 흘러도 잊히지 않는 기억의 힘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운호의 죽음을 직접적으로 설명하지 않는 연출 역시 처음에는 의아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후 감독이 의도적으로 사인을 열어두었다는 이야기를 접하고 나니 그 선택이 이해됐다. 변우석 배우에게조차 정확한 이유를 알려주지 않았다는 점에서, 영화는 사건의 원인보다 남겨진 사람의 감정에 더 집중하고 있었던 셈이다. 실제로 부산국제영화제 관객과의 대화에서도 운호의 사인에 대한 질문이 가장 많이 나왔다고 하는데, 그만큼 많은 관객들이 결말을 각자의 방식으로 받아들였다는 의미로도 보인다. 김유정은 엔딩을 좋아했고 변우석은 아쉬움을 느꼈다고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두 반응 모두 충분히 이해가 갔다. 감독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은 죽음과 비슷하다"라고 말했는데, 영화를 보고 나니 그 말이 더욱 크게 다가왔다. 그래서 운호의 부재는 단순히 한 사람의 죽음이라기보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청춘의 한 시절이 사라지는 감각처럼 느껴졌다. 결국 이 작품은 첫사랑의 설렘만을 이야기하는 영화가 아니다. 오히려 첫사랑이 왜 오랫동안 기억 속에 남는지, 그리고 그 기억이 왜 때로는 첫 이별의 감정과 닮아 있는지를 천천히 보여준다. 그래서 영화가 끝난 뒤에도 가장 오래 남는 것은 사랑이 이루어졌는지의 결과가 아니라, 그 시절을 함께 지나온 사람과 감정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비디오 속 1999년
이 영화를 특별하게 만드는 요소 중 하나는 1999년이라는 시대 배경이다. 비디오테이프, 삐삐, 공중전화, PC통신, 캠코더 같은 물건들은 지금 기준으로 보면 다소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는 오히려 이런 아날로그적인 도구들이 첫사랑의 감정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 준다. 스마트폰 하나로 대부분의 일이 해결되는 지금과 달리, 당시에는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을 확인하기 위해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보라가 좋아하는 사람의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 리서치 기관 직원인 척 전화를 걸고, 양호실에 아픈 척 찾아가며, 방송반에 들어가는 과정도 그런 시대적 배경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행동들이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다소 비효율적일 수 있지만, 오히려 그 과정이 있었기에 감정이 더 천천히 쌓이고 설렘도 커진다. 만약 스마트폰과 SNS가 존재했다면 몇 번의 검색으로 끝났을 일들이었겠지만, 영화는 그런 불편함마저 첫사랑의 일부로 담아낸다. 그래서 영화를 보고 있으면 당시를 직접 경험하지 않았더라도 자연스럽게 그 시절의 감성을 이해하게 된다. 이처럼 시대적 디테일이 자연스럽게 살아 있는 이유는 방우리 감독의 실제 경험이 바탕이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감독은 시나리오 작업 과정에서 자신의 청소년 시절 친구들과 주고받았던 교환 일기를 다시 꺼내 보며 이야기를 구상했다고 밝혔다. 그래서인지 영화 속 풍경과 소품들은 연출된 장치라기보다 실제 기억을 옮겨 놓은 것처럼 느껴진다. 특히 캠코더로 서로를 촬영하고 비디오테이프에 순간을 기록하는 모습은 단순한 소품 활용을 넘어, 흘러가는 시간을 붙잡아 두고 싶은 마음처럼 다가온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레트로 감성이 젊은 배우들에게도 낯설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방우리 감독은 1990년대 소품들을 보여줬을 때 배우들이 생각보다 익숙하게 받아들였다고 이야기했다. 필름 카메라를 사용하거나 LP를 수집하는 취미를 가진 배우들에게 레트로 문화는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새로운 감성으로 소비되고 있었던 셈이다. 덕분에 영화 속 1999년의 풍경도 어색한 재현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분위기로 완성될 수 있었다. 결국 1999년이라는 시대 배경은 <20세기 소녀>의 감정을 완성하는 중요한 장치다. 그 시절을 경험한 관객에게는 추억과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경험하지 못한 세대에게는 새로운 감성을 선사한다. 실제로 보라비디오 가게와 공중전화 부스,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오가는 교실 풍경을 보고 있으면 화면 전체에서 따뜻한 온기가 느껴진다. 여기에 조성모의 〈To Heaven〉, 박기영의 〈시작〉 같은 당시의 음악까지 더해지면서 영화가 전하려는 감정은 더욱 선명해진다. 그래서 이 작품의 1999년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첫사랑의 기억을 더욱 아름답게 만드는 또 하나의 주인공처럼 느껴진다.
방우리 감독 장편 데뷔
<20세기 소녀>는 방우리 감독의 첫 장편 연출작이다. 그전까지 방우리 감독은 단편 영화로 이름을 알려온 감독으로, 단편 영화 <영희 씨>를 통해 제35회 청룡영화상 단편영화상과 제17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관객상을 수상하며 섬세한 감정 연출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래서 이 영화는 단순한 첫 장편이 아니라, 단편에서 보여준 감성을 얼마나 확장할 수 있을지 기대를 모았던 작품이기도 했다. 사실 단편과 장편의 차이는 생각보다 크다. 짧은 시간 안에 하나의 감정을 보여주는 것과 두 시간 가까운 러닝타임 동안 이야기의 흐름과 감정을 유지하는 것은 전혀 다른 영역에 가깝다. 그런 점에서 <20세기 소녀>는 첫 장편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안정적인 완성도를 보여준다. 첫사랑의 설렘과 아쉬움, 그리고 시간이 지난 뒤 남는 그리움을 자연스럽게 연결하면서도 감정의 흐름이 크게 흔들리지 않는다. 영화를 보면서도 데뷔작 특유의 거친 느낌보다는 자신의 색깔이 분명한 감독의 작품이라는 인상이 더 강하게 남았다. 이 작품은 원래 극장 개봉을 목표로 제작됐다. 그러나 시나리오 작업이 마무리될 무렵 코로나19가 확산되면서 영화 산업 전체가 큰 변화를 겪었고, 그 과정에서 넷플릭스 공개를 선택하게 됐다. 방우리 감독 역시 처음에는 극장 개봉에 대한 아쉬움이 있었다고 밝혔다. 다만 넷플릭스를 통해 전 세계 관객과 동시에 만날 수 있다는 점을 큰 장점으로 느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한국의 첫사랑 이야기가 다양한 국가의 시청자들에게도 공감을 얻으면서 그 선택의 의미를 보여주었다. 이 작품은 공개 직후 넷플릭스 글로벌 TOP10 비영어 영화 부문 상위권에 오르며 한국뿐 아니라 여러 국가에서 관심을 받았고, 감독의 첫 장편은 예상보다 더 많은 관객에게 전달될 수 있었다. 이 영화에서 또 하나 인상적인 부분은 카메오 출연진이다. 류승룡, 박해준, 공명, 옹성우, 이범수, 한효주 등 다양한 배우들이 짧지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들 중 상당수는 방우리 감독과의 인연을 통해 이 영화에 참여하게 됐다고 알려져 있는데, 첫 장편 작품에 이렇게 많은 배우들이 힘을 보탰다는 사실만으로도 감독에 대한 신뢰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방우리 감독은 앞으로도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 속에서 특별한 순간을 발견하는 이야기를 만들고 싶다고 말한 바 있다. 실제로 <20세기 소녀> 역시 거창한 사건보다 누구나 한 번쯤 경험했을 법한 첫사랑의 기억을 섬세하게 담아내며 많은 공감을 얻었다. 그래서 이 작품은 단순히 흥행에 성공한 영화라기보다, 방우리 감독이 자신만의 감성과 연출 방향을 분명하게 보여준 성공적인 장편 데뷔작으로 기억될 만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