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초부터 지구를 지켜온 열 명의 이터널스, 클로이 자오 감독이 신화적 스케일 위에 정적인 화면미학과 인물들의 내면을 담아냈습니다. 앤젤리나 졸리와 마동석이 신화 속 존재로 스며드는 과정, 라민 자와디의 절제된 배경음악이 그려내는 신화적 여운까지, 화려한 액션보다 분위기를 천천히 음미하고 싶은 관객에게 어울리는 작품입니다.
<이터널스> 신화의 시작점: 태초의 수호자들
마블 영화를 꽤 오래 챙겨봤지만 <이터널스>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클로이 자오 감독이 연출과 각본을 모두 맡았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이 영화가 낯설게 느껴진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원래 마블 팬이었던 그녀가 먼저 제안해서 시작된 프로젝트였고, 그 애정이 화면 곳곳에 묻어났습니다. 태초부터 지구를 지켜온 열 명의 존재라는 설정은 처음엔 솔직히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지만, 낯섦보다는 신선함으로 다가온 순간이 더 많았습니다. 세르시, 이카리스, 스프라이트, 길가메시처럼 이름부터 신화적인 존재들이 한 화면에 모이는 순간에는 반가움마저 느껴졌습니다. 이 영화가 단순한 오리진 스토리가 아니라 신화를 통째로 다시 쓰려는 시도라는 생각이 들면서, 마블 영화에서 흔히 보기 힘든 야심이 오히려 마음에 들었습니다. 시간을 오가며 과거와 현재를 번갈아 보여주는 구성은 초반엔 다소 산만하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후반부로 갈수록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낯설었던 시간 구성이 실은 인물들 사이에 쌓인 수천 년의 무게를 전달하기 위한 장치였다는 걸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촬영 방식도 인상에 오래 남았습니다. 실제 사막과 바다, 화산 지대까지 찾아다니며 로케이션 촬영을 강행했다는 후일담을 접하고 보니 화면 속 풍경이 유난히 생생했던 배경이 짐작됐습니다. 인공조명을 최소화하고 자연광을 살린 화면은 <노매드랜드>에서 이미 보여준 감독 고유의 색이었고, 그 결과 슈퍼히어로 영화에서는 보기 힘든 차분한 톤이 만들어졌습니다. 저는 오히려 이 부분이 <이터널스>를 다른 마블 영화와 구분 짓는 가장 큰 매력이라고 생각합니다. 배우들의 존재감 역시 낯선 세계관을 받아들이는 데 큰 힘이 됐습니다. 앤젤리나 졸리와 마동석처럼 익숙한 얼굴들이 신화 속 인물로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과정을 지켜보는 재미가 상당했고, 그 익숙함 덕분에 방대한 설정도 한결 수월하게 따라갈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 데비안츠라는 오랜 위협이 다시 나타나면서 흩어져 있던 이터널스가 모이는 흐름이 더해지자, 각 인물이 왜 지금의 모습으로 살아왔는지도 자연스럽게 이해가 됐습니다. 설정을 설명하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이야기 자체로 녹아든 느낌이어서, 보는 동안 지루할 틈이 별로 없었습니다.
자오의 연출력: 정적인 화면 미학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화면의 속도감이었습니다. 액션 위주로 몰아치는 다른 마블 영화와 달리, 이 영화는 인물과 풍경을 오래 응시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클로이 자오 감독이 <노매드랜드>를 촬영할 때 썼던 카메라 워킹을 그대로 가져왔다는 이야기를 접하고 나서, 왜 이 영화의 화면이 유독 차분하게 느껴졌는지 이해가 됐습니다. 광각 렌즈로 담아낸 사막과 바다, 화산 지대의 풍경은 배경이라기보다 이야기의 일부처럼 다가왔고, 인물들이 그 거대한 공간 속에 놓여 있다는 인상을 계속 상기시켰습니다. 전투 장면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화려한 합이나 속도감으로 긴장을 만들기보다, 인물 간의 거리와 시선, 정지된 순간을 통해 감정을 전달하려는 시도가 장면마다 묻어났습니다. 이 부분에서는 호불호가 갈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슈퍼히어로 영화 특유의 쾌감을 기대하고 극장에 갔다면 다소 심심하게 느껴질 법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오히려 그 여백 덕분에 감정을 곱씹을 시간이 생겨서 좋았습니다. 세르시와 이카리스가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유독 그랬는데, 대사가 오가는 속도보다 두 사람 사이의 침묵이 먼저 눈에 들어왔습니다. 표정 하나, 시선이 머무는 시간 하나로도 두 사람 사이에 쌓인 감정의 무게가 충분히 전해졌고, 오히려 말을 아낀 덕분에 그 관계의 온도가 더 선명하게 다가왔습니다. 자오 감독은 이런 연출 방식에 대해 캐릭터와 환경의 상호작용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고 밝힌 적이 있습니다. 실제로 화면 속 인물들은 배경과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그 공간의 일부로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었습니다. 마블 영화에서 이런 정적인 화면 미학을 정면으로 시도한 사례는 드물었기에, 완성도에 대한 평가를 떠나 이 시도 자체는 충분히 의미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자와디의 음악: 신화를 담은 배경음악
<이터널스>를 보고 가장 오래 기억에 남은 것은 의외로 대사가 아니라 음악이었습니다. 엔딩 크레디트가 모두 올라갈 때까지도 웅장하면서도 신비로운 선율이 귓가를 맴돌았는데, 일반적인 슈퍼히어로 영화에서 들을 수 있는 강렬한 액션 중심의 음악과는 확실히 다른 분위기였습니다. 화려하게 존재감을 드러내기보다 영화 전체를 감싸는 듯한 배경음악 덕분에 작품이 가진 신화적인 분위기가 더욱 깊게 전달됐습니다. 이후 음악을 맡은 라민 자와디에 대해 찾아보면서 이런 느낌이 어디에서 비롯됐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드라마 <왕좌의 게임>으로 에미상을 두 차례 수상한 작곡가이며, 2008년 <아이언맨>의 음악에도 참여한 만큼 마블과도 오랜 인연을 이어온 인물입니다. 굵직한 작품들을 두루 거쳐온 이력을 알고 나니, 왜 이 영화의 음악이 그렇게 여유롭게 느껴졌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습니다.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던 부분은 음악이 화면보다 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많은 마블 영화가 전투 장면에서 강렬한 음악으로 긴장감을 극대화한다면, 이 영화는 인물들의 감정을 조용히 따라가는 방식을 선택합니다. 덕분에 음악이 감정을 일부러 자극하기보다 등장인물의 내면을 차분하게 비추는 역할을 합니다. 세르시와 이카리스가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는 굳이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두 사람이 지나온 시간과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졌습니다. 그 배경에는 잔잔하게 흐르던 배경음악이 있었습니다. 대사가 잠시 멈춘 사이를 음악이 조용히 채워주고 있었고, 그 덕분에 두 사람 사이의 침묵이 어색하게 느껴지기보다는 오히려 감정이 쌓이는 시간처럼 다가왔습니다. 저는 이 장면을 보면서 대사보다 음악이 더 많은 말을 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고, 개인적으로는 영화 전체에서 화면과 음악이 가장 이상적으로 맞물린 순간이라고 느꼈습니다. 셀레스티얼이 등장하는 장면에서도 자와디의 음악은 특별한 존재감을 보여줍니다. 인간의 시간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살아가는 거대한 존재들을 표현하기 위해 웅장한 오케스트라와 신비로운 분위기를 절제된 방식으로 활용했습니다. 화면이 전달하는 압도적인 규모에 음악이 조용히 스며들면서 신화적인 분위기가 한층 짙어졌습니다. 라민 자와디는 <퍼시픽 림>, <타이탄의 멸망> 등 대규모 세계관을 다룬 작품의 음악을 맡은 경험이 있는데, 거대한 존재들의 이야기를 담은 <이터널스>에서도 그 감각이 은근하게 배어 나온 듯했습니다. 화려한 액션보다 인물과 세계관의 분위기를 천천히 음미하고 싶은 관객이라면, 이 작품의 음악이야말로 관람 후에도 오래 기억에 남는 또 하나의 매력이 되어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