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슈퍼히어로 영화를 보러 갔다가 뜻밖에 나 자신의 지난 시간을 돌아보게 된 적이 있으신가요? 저는 <이터널스>에서 그런 경험을 했습니다. 수천 년을 살아온 존재들의 이야기인데, 이상하게도 두 아이를 키우며 하루하루를 보내는 제 삶이 겹쳐 보였습니다. 화려한 액션보다 느린 호흡과 잔상이 오래 남는 영화, 그 이유를 조금 풀어보겠습니다.
마블 영화가 이렇게 조용해도 되나요? — 클로이 자오의 화면미학
처음 <이터널스>를 봤을 때, 솔직히 예상 밖의 느낌이었습니다. 마블 영화라면 당연히 빠른 편집과 화려한 전투씬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화면은 생각보다 훨씬 오래 멈춰 있었습니다. 인물의 얼굴을, 지평선을, 파도가 밀려오는 해안선을 카메라가 서두르지 않고 바라봤습니다.
연출을 맡은 클로이 자오 감독은 로케이션 촬영(on-location filming)을 고집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것은 스튜디오 세트에 공간을 재현하기보다 실제 사막과 화산 지대, 바닷가를 직접 찾아가 그 장소가 가진 풍경과 빛을 그대로 화면에 담아내는 방식입니다. <이터널스>에서도 이러한 촬영 방식이 그대로 적용됐고, 인공조명을 최소화한 채 자연광(natural lighting)을 적극적으로 활용했습니다. 태양이나 하늘에서 오는 빛을 가공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는 자연광은 화면에 인위적이지 않은 질감을 만들어내는데, 제가 영화를 직접 봤을 때 바로 그 차이가 꽤 뚜렷하게 느껴졌습니다. 다른 마블 영화들과 비교했을 때 화면의 온도 자체가 달랐습니다.
광각 렌즈(wide-angle lens)로 담아낸 사막과 바다 풍경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이야기의 일부처럼 기능했습니다. 광각 렌즈란 넓은 시야각을 확보해 공간감을 극대화하는 렌즈로, 인물이 거대한 자연 속에 놓인 작은 존재처럼 보이게 만듭니다. 수천 년을 살아온 존재들이 결국 이 거대한 지구 위에 발을 딛고 서 있다는 느낌이 바로 그 렌즈에서 나왔습니다.
세르시와 이카리스가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저는 대사보다 그 사이의 침묵에 먼저 눈이 갔습니다. 표정 하나, 시선이 멈추는 위치 하나가 수천 년의 감정을 압축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연출 방식에 대해 자오 감독은 캐릭터와 환경의 상호작용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고 밝혔는데, 화면을 보고 나서야 그 말이 진심이었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전투 장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속도감 있는 편집보다 인물 간의 거리와 정지된 순간으로 긴장을 만들려는 시도가 곳곳에 있었습니다. 호불호가 갈릴 수 있겠다는 생각은 들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여백 덕분에 감정을 곱씹을 시간이 생겨서 오히려 좋았습니다.
- 로케이션 촬영 — 사막, 화산 지대, 해안가 등 실제 자연 현장을 사용
- 자연광 활용 — 인공조명 최소화로 화면에 비인공적인 질감 부여
- 광각 렌즈 — 인물과 공간의 관계를 강조, 거대한 세계관을 시각적으로 표현
- 정적인 편집 리듬 — 빠른 컷 대신 침묵과 시선으로 감정 전달
요약: 클로이 자오의 화면미학은 자연광·로케이션·광각 렌즈로 완성되며, 슈퍼히어로 영화에서 보기 드문 정적인 아름다움을 만들어냈습니다.
대사보다 음악이 더 많은 말을 한다면? — 라민 자와디의 배경음악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는 동안에도 자리를 뜨지 못했습니다. 정확히는 음악 때문이었습니다. 웅장하면서도 어딘가 쓸쓸한, 신화적인 선율이 극장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습니다. 제가 직접 그 자리에 앉아서 느꼈을 때, 이건 일반적인 슈퍼히어로 영화의 음악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음악을 담당한 라민 자와디는 드라마 <왕좌의 게임>으로 에미상(Emmy Award)을 두 차례 수상한 작곡가입니다. 에미상은 미국 텔레비전 예술과학아카데미가 수여하는 상으로, 방송계의 아카데미상이라고 불릴 만큼 높은 권위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이미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린 작곡가인 만큼 그의 음악이 <이터널스>의 분위기를 어떻게 만들어냈는지도 자연스럽게 관심이 갔습니다. 특히 자와디는 2008년 <아이언맨>의 음악에도 참여한 이력이 있어, 이번 <이터널스> 작업은 마블과의 오랜 인연이 다시 이어진 경우라고 볼 수 있습니다(출처: IMDb, 라민 자와디 필모그래피).
제가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음악이 화면을 압도하지 않는다는 점이었습니다. 다이내믹 레인지(dynamic range)라는 개념이 있는데, 이는 음악에서 가장 조용한 부분과 가장 시끄러운 부분 사이의 폭을 의미합니다. 자와디는 이 작품에서 다이내믹 레인지를 의도적으로 좁혀, 터지는 사운드보다 잔잔하게 흐르는 선율 위주로 곡을 구성했습니다. 덕분에 음악이 감정을 강요하기보다 등장인물의 내면을 조용히 따라가는 역할을 했습니다.
세르시와 이카리스의 대화 장면이 다시 떠오릅니다. 두 사람 사이에 말이 멈추는 순간마다 배경음악이 그 공백을 채웠는데, 어색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침묵이 감정이 쌓이는 시간처럼 느껴졌습니다. 대사가 끝난 자리를 음악이 이어받아 두 사람이 지나온 수천 년을 설명하는 것 같았습니다.
셀레스티얼(Celestial)이 등장하는 장면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셀레스티얼이란 마블 코믹스에 등장하는 우주적 존재로, 인간의 시간 감각으로는 가늠할 수 없는 규모와 수명을 가진 신적 존재를 가리킵니다. 자와디는 이 거대한 존재들이 화면에 등장할 때 오케스트라를 폭발시키는 대신, 신비로운 분위기를 절제된 방식으로 풀어냈습니다. 그 덕분에 화면이 전달하는 압도감이 음악에 묻히지 않고 오히려 배가됐습니다. 제 경험상, 이런 절제된 사운드 디자인은 영화 전체의 분위기를 균형 있게 유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요약: 라민 자와디의 음악은 화면을 앞서지 않고 인물의 감정과 침묵을 조용히 뒷받침하며, 신화적 분위기를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요소로 작동했습니다.
'오래 살았다'는 것과 '잘 살았다'는 것은 왜 다를까요? — 선택의 무게
<이터널스>를 보면서 이상하게도 계속 제 이야기를 떠올렸습니다. 수천 년을 살아온 존재들이 결국 '무엇을 선택하며 살았는가'라는 질문 앞에서 갈라지는 모습이, 두 아이를 키우며 직장을 다니는 평범한 일상과 묘하게 겹쳤습니다.
영화 속 이터널스(Eternals)는 같은 목적 아래 태초부터 지구를 지켜온 열 명의 존재입니다. 이터널스란 셀레스티얼이 창조한 불멸의 존재들로, 데비안츠(Deviants)로부터 인류를 보호하는 임무를 부여받고 지구에 파견된 슈퍼휴먼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수천 년이 지나면서 이들은 서로 다른 선택을 하고 다른 삶을 살아왔습니다. 같은 임무였지만, 각자가 그 시간을 어떻게 채웠는지는 전혀 달랐습니다(출처: Marvel 공식 사이트, Eternals).
앤젤리나 졸리가 연기한 테나와 마동석이 연기한 길가메시를 보면서 특히 그 생각이 강해졌습니다. 두 배우는 신화 속 이름을 가진 존재들에게 매우 자연스럽게 스며들었습니다. 익숙한 얼굴이 낯선 세계관을 관객에게 연결해 주는 다리 역할을 한다는 걸 제가 직접 느낄 수 있었습니다. 방대한 설정이 버겁게 느껴질 수 있었는데, 이 두 배우가 등장할 때마다 긴장이 풀렸습니다.
영화를 보고 난 뒤 아이들에게 무엇을 남겨주고 싶은가를 다시 생각했습니다. 좋은 성적이나 많은 경험보다, 자신의 선택을 스스로 믿을 수 있는 태도가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커졌습니다. 그리고 그건 아이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저 자신에게도 필요한 태도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시간을 얼마나 살았느냐보다 그 시간 동안 무엇을 선택했는가가 결국 그 사람을 만든다는 것, 수천 년을 살아온 신화 속 존재들이 오히려 그 사실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줬습니다.
영화의 시간 구성도 처음에는 산만하게 느껴졌습니다. 과거와 현재를 번갈아 보여주는 비선형 서사(non-linear narrative) 방식이었는데, 비선형 서사란 시간 순서를 따르지 않고 과거와 현재를 교차하며 이야기를 전개하는 구성을 말합니다. 초반에는 정신없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그 구성이 인물들 사이에 쌓인 수천 년의 무게를 전달하기 위한 장치였다는 걸 이해하게 됐습니다. 낯섦이 이해로 바뀌는 그 순간이, 제가 이 영화를 오래 기억하게 된 이유 중 하나였습니다.
요약: 이터널스의 서사는 '오래 살아온 존재들의 선택'을 통해 나 자신의 시간을 돌아보게 만들며, 비선형 서사 구성이 그 감정의 무게를 더욱 깊이 전달합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이터널스는 마블 영화 중에서 왜 유독 느리다는 평이 많나요?
A. 클로이 자오 감독이 <노매드랜드>에서 사용한 정적인 카메라 워킹과 자연광 중심의 촬영 방식을 그대로 적용했기 때문입니다. 빠른 편집으로 긴장감을 높이는 대신, 인물과 풍경을 오래 응시하는 방식으로 감정을 전달하는 구성을 선택했습니다. 쾌감보다 여운을 원하는 관객에게는 장점이 될 수 있지만, 기존 마블 팬에게는 낯설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Q. 이터널스 음악이 다른 마블 영화 음악이랑 다른 이유가 뭔가요?
A. 라민 자와디가 액션 장면의 긴장감을 높이는 데 집중하기보다, 인물의 감정과 침묵을 조용히 따라가는 방식으로 음악을 구성했기 때문입니다. 다이내믹 레인지를 좁혀 전반적으로 잔잔한 선율 위주로 운영한 결과, 음악이 화면을 앞서지 않고 분위기를 깊이 있게 감싸는 효과를 만들어냈습니다.
Q. 이터널스 등장인물이 너무 많아서 따라가기 힘든데 어떻게 보면 좋을까요?
A. 저도 처음에는 열 명의 캐릭터와 비선형 서사가 겹치면서 정신없다고 느꼈습니다. 처음부터 모든 인물을 파악하려 하기보다, 세르시와 이카리스의 관계를 중심축으로 삼고 나머지 인물들의 선택이 어떻게 다른지를 비교하며 보면 훨씬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따라갈 수 있습니다. 앤젤리나 졸리(테나)와 마동석(길가메시) 조합을 길잡이 삼는 것도 방법입니다.
Q. 클로이 자오 감독이 마블 영화를 찍은 게 어떤 의미가 있나요?
A. 클로이 자오는 <노매드랜드>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한 작가주의 감독입니다. 블록버스터 슈퍼히어로 영화에 자연광, 로케이션 촬영, 정적인 화면 미학이라는 작가적 스타일을 정면으로 적용한 사례는 마블 역사에서 드문 일이었습니다. 흥행과 별개로, 마블이 상업적 공식 밖의 시도를 허용했다는 점에서 충분히 의미 있는 작품으로 평가됩니다.
결론
<이터널스>는 마블 영화에서 보기 드문 시도를 담은 작품입니다. 화려한 전투나 빠른 전개를 기대하고 봤다면 실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클로이 자오의 화면미학과 라민 자와디의 배경음악이 만들어내는 여운은, 영화가 끝난 뒤에도 한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얼마나 오래 살았는가'보다 '그 시간 동안 무엇을 선택했는가'를 질문하게 됐습니다. 두 아이를 키우며 바쁘게 지나가는 날들 속에서, 시간을 그냥 흘려보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더 선명해졌습니다. 수천 년을 살아온 신화 속 존재들이 결국 같은 질문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위로가 됐습니다.
<이터널스>를 아직 보지 않으셨다면, 빠른 오락 영화를 기대하기보다 한 편의 느린 신화를 읽는 마음으로 접근해 보시길 권합니다. 화면미학과 배경음악을 의식하며 보면, 처음과 다른 영화가 보일 수도 있습니다.